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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인들에 관한 이야기
    스토킹/스크랩 2022. 1. 5. 08:07

    처음에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다보면 사람을 써야하고 그러면 중국인들도 꽤나 섞여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오면서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나는 중국사람에 대해 좋은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물론 오원춘과도같은 흉악범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스치듯이 만나왔던 중국아줌마들이나 그런 사람들은 한국사람들과같은 각박한 이미지가 없었기에 더 순박해보였고, 그래서 대체로 좋은 이미지로 알고 있었다. 

     

    보통은 다 스치듯이 지나치지만 처음 가까이에서 잠시 알고 지낸 사람은 조치원의 중국인 우씨였다. 

    친구네집에 놀러와있다가 만났는데 평판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마음도 착해보였다. 한국에 오래 산듯했고 옷은 주로 메이커로 입고다니고 중국사람 이미지처럼 사람들과 모여서 마작하는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잠시 만나적도 있었는데 사람이 나쁜사람은 아니어보였다. 자신들은 한번 만나면 몇백명씩 만나고 100명, 200명씩 만난다고 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했던 적도 있었고, 내 친구의 사촌, 최영찬이라는 사람과 함께 일을 다닌다고 했다. 

    식당에 가면 푸짐하게 한턱을 쏘고, 당시 내가 너무 힘이들어 생활비가 필요해서 통신사에서 핸드폰 3대를 뽑는 조건으로 100만원을 빌린적이 있었는데 (생계차단때문에) 내 명의로 된 핸드폰이 다른사람에게 가있으니 너무 불안하다고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 돈을 시급히 갚아버린적이 있었다. 돈을 벌러온 사람이기 때문에 현지의 한국인에게 땡전한푼 손해볼스타일은 아니었다. 명의이전을 금방 해준다던 인간들이 명의이전을 해주지않고 계속 버티고 돈을 갚았는데도 

    전혀 해결해줄 생각을 안하자 나는 불안해져서, 행여나 내폰이 대포폰으로 쓰일까봐 명의이전 안해줘도 되니까 당장 3대 다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자 2대만 가져왔고 1대는 계속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다가 나중에 간신히 돈으로 돌려받았다. 

    (이부분 나중에 기술)

    어쩔수없이 전화기 2대를 떠넘겨받은 셈인데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고민하는데 딸한테 핸드폰이 있냐고 했더니 핸드폰이 없다고 했다. 고려대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해서 비자가 있으면 전화기를 뽑을수 있는데 왜 없냐고 했더니 나중에 뽑아줄거라고 했다. 그때 우씨도 딱히 마땅히 전화기가 없었다. 그래서 2대를 딸과함께 해지전까지만 사용해줄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그 두사람이 내 명의의 핸드폰을 쓰게 된것이다. 

     

    현재 쓰고 있는 5113번은 우씨의 딸이 쓰던 핸드폰번호였는데 계약기간이 길어서 해지비가 없는 내것을 해지하고 돌려받은 핸드폰을 내가 사용하게 된것이다. 아무튼 이런 우씨와의 인연도 2013년 1월 청원군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때부터 막내동생과 함께 잠시 지냈기때문에 거기까지 였다. 전화기는 내가 일본에서 돌아온후에 받았다. 

     

    2. 두번째 , 

    스토킹때문에 청원군에서 서울의 신정동으로 이사를 갔고 내 바로 옆방에는 중국인아줌마와 딸, 그리고 아저씨가 함께 살았다. 딸은 거의 저녁에 돌아와서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고, 아저씨는 늘 집안에 있었다. 가끔 일을 가면 한참있다 돌아온다고 했는데 집에 있을때는 거의 밖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있었다. 

    중국인 아줌마와 어린 손녀가 함께 낮에 있었다. 이 중국아줌마가 굉장히 예민해져있었던 상태인 나를 많이 짜증나게 했었다. 처음 이사갔을때 아래집 폐지 줍는 할머니는 바로 다음날 옆집 중국아줌마와 우리방 바로 앞 계단에서 지난밤 우리집에서 삼계탕을 해먹었는데 너무 냄새난다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청원군에서 이상한 스토킹이 시작이 된 상태였기때문에 또 그런일이 생길까봐 신경을 날을 새우고 있었는데 둘이 그러고 속닥이고 있는것을 보면서 뭔가 강하게 대처해야 만만히 보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우리 대문의 맞은편 할머니들이 각각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 세분이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슬슬 골목길에 앉아서는 우리집창문을 가리키면서 ' 저집이다 저집 , 담배꽁초를 어디서 그렇게 버리는가 했더니 저집이구만 ' 

    이러는 거였다. 지금같으면 벌써 아 또 태클들어오기 시작했구나 , 저앞에 방을 따로 얻어두고 슬슬 시비를 걸어오는구나 라고 생각했을터이지만 그때는 왜 그러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욕실의 창문은 밖에서 방충망으로 가려져서 꽁초를 버리고싶어도 버릴수가 없었기때문이다. 

    그러다 부엌에서 뭘 하려고 서있었는데 우리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옆집 중국인 아줌마가 우리 현관에 후렌치파이 정도크기의 박스가 세개정도 모인것을 보고 ' 저봐저봐 박스를 저렇게 쌓아두고도 갖다줄 생각도 안하는거봐 ' 이러는거였다. 

    지금같으면 일부러 계단앞에 서서 저렇게 들으라는듯이 흉을보면서 은밀히 시비를 걸어오는구나 라고 생각했을것이다. 

    나는 강하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삼계탕이 뭐가 어때서 그게 그렇게 냄새가 나고 그러는거냐고 따져 물었고, 

    중국인아줌마한테도 거침없이 대했다. 그때 밖에 나가면 온통 침을 뱉어대고 뭐를 사러가도 기분이 상해져서 돌아왔기때문에 날마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었다. 나중에는 아예 이 중국아줌마랑 할머니 셋이 골목에서 돗자리를 깔고서 난장을 까면서 온종일 소음을 일으키면서 사람을 대놓고 조롱을 하고 약을 올리고 그런식으로 행동을 하는것이다. 

    정말 싫은 사람이었다. 물론 나도 행동을 잘하지는 않았다. 걸고 넘어지는 인간들의 함정을 모르고 그대로 걸려든것이다. 

     

    3. 일본에 들어가서 뭔가 연계되어있다는것을 느끼고 한국으로 돌아와야된다고 생각했다. 남아있는 비자기간 1년을 채우면서 돈을 벌기로 하고 한국에 들러 아이를 친구에게 맡기고 돈을 벌러 들어갔다. 돈이 없으면 대처가 안되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일본에서도 삶을 철저히 관리당했었다. 

    그때 일을 하면서 자꾸 친하게 다가오는 중국인 여자 2명이 있었다. 둘다 명랑한 성격으로 겉보기에는 착해보였는데, 

    이상스럽게도 전혀 친해질것같은 공감대가 없는데도 , 가끔 밥을 먹자고 하거나, 밤새 여기저기 술을 사면서 클럽에 데리고 가거나 했었다. 딱히 나에게 해꼬지를 하지는 않았었고, 오히려 다들 나에게 테러를 하는 마당에 그 둘은 스토킹적인 행동을 하지않는 유일한 애들이었다. 

     

     

    4. 일본에서 돌아와서 조치원에 방을 얻고 친구가 아이를 못봐준다고 하여 직업소개소를 알아봤는데 조치원소개소에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할수없이 서울 대림동의 한 직업소개소에서 처음에 중국아줌마 한분을 소개 받았다. 

    그런데 서울을 다녀오면서 아이가 볼거리에 걸려 을지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는데 그 사이에 아줌마가 불안하다고 느꼈는지 돌아가겠다고해서 다른분을 소개받았다. 이게 좀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면 이상한 부분들이 있다. 

    그때 3층에 우리집이 있었는데 전실이 거의 비어있다시피한 원룸이었다. 위층에는 중국인들로 보이는 노가다꾼들이 

    여러명있었고, 우리건물 바로 옆건물에 같은구조의 원룸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층인지 그 위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는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대구로 가서 일을 했는데 할머니와 함께 얘기도중 할머니가 이전에 살던 입주가정집은 tv에 나오는 유명한 가정의학과 의사라고 했다. tv를 보면서 말을했기때문에 얼굴을 기억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자식교육에 관해 얘기하다가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상당히 높았었고, 딸은 일본에서 뇌공학박사를 하고 있고, 아들도 북경에서 뇌공학박사라고 했다. 그렇게 잘된 자식들이 있는데 .... 라고 했더니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되지 않겠냐고 이미 중국에서 살만한 형편이지만 더 나이들기전에 한푼이라도 더 벌고 싶어서 이 일을 한다고 했었다. 

    나는 할머니가 교육열이 높고 첫인상보다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었다. 솔직히 할머니를 처음 커피숖에서 봤을때 얼굴은 웃는데 눈동자가 웃지 않는것을 보고 조금 별로 인상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웬지 어딘가 잔인해보였기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얘길 나눠보니 괜찮은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음식은 거의 잘 만들지 못하는것같았고,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부터 하는 모습을 보고 , 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가정집에서 입주해서 살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그러려니 했었다. 

     

     

    5. 나는 대구에서 남편을 만나 창녕에 들어가게 됐는데 서로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한 이후로 아이를 데리러 조치원에 와 있었다. 전화가 와서 남편이 인부들 돈을 줘야한다고 10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은행시간때문에 돈을 찾지 못했다는거다. 너무 짜증이 나서 그러면 내일주겠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중국인인부들이라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거였다. 그리고 후에 시골에서 함께 살때에 마늘을 심을철에 새벽에 중국인인부들을 데리러 황소인력으로 차를 끌고갔는데 거기서 남편차와 내차에 나눠서 인부들을 싣고 밭으로 갔었다. 내 차에 탄 중국인 아줌마가 집단스토킹 당할때에 입에서 내는 소리를 쫙쫙~ 거리면서 내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익숙해져있는 느낌인지 스토킹을 처음 해본것이 아닐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6. 대구에서 일할적에 손님으로 온 남자가 있었는데 나와 대화를 나눴는데 웬지 사람의 분위기가 의료계통쪽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여겨져서 물어봤더니 맞다고 한적이 있었다. 

     

    7. 창녕의 로얄호텔에서 일할적에 단체관광을 정기적으로 오는 여행사가 있었는데 서울의 중문여행사였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탄 관광차 여러대가 묵으러 오는데 카운터에서 본 사람들이 나를 흘깃 쳐다볼때에 나를 처음보는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8. 남편과 떨어져 서울 이화동에서 살적에 위층 이화장에 중국인 학생들로 보이는 학생들이 여러명이서 들어가는것을 보았다. 

     

    9. 일본인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는 서울의 명동의 고깃집에서 일을 했는데 직원들이 중국인 남자직원과 여자직원이 있었다. 주인아줌마가 중국인 여자직원한테 뭐라고 하는지 잘은 못들었지만 뭐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한국이 무슨 민주주의냐고 하면서 하나도 민주주의 아니라고 하는걸 봤다. 아마도 뭔가 내얘기를 하다가 그런말이 나온듯했었다. 

    스토킹이 생계지를 감싸고 벌어진다는것을 생각해보면 내가 가는곳 그 어디에도 그냥 있는 사람들이 아닌것이다. 

     

     

    10. 사리원에도 중국인 아줌마들이 네명정도 있었는데 화장실갈때마다 중국인 아줌마 두명이 가래침을 양치하면서 카악 카악 뱉기도 했었고, 내가 밖을 쳐다보면 뭘보나를 감시하듯 와서 보는 행동들을 했었던것을 보면 역시나 그곳에서 있는 사람들도 그냥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은 전혀 내막을 모르고 뭔가 당부를 듣고 그런행동을 하지 않았나싶고, 한사람은 밖의 화장실앞에서 인상이 험악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굉장히 비호감적인 기분나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끝마칠 시간이 되면 어딘가로 사라지는데 그 사람이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하면 퇴근하라는 얘기를 듣곤했었다. 그곳은 상당히 유명한 인사들이 밥을 먹으러 더러 오곤했었다. 

    피부과의사 함00 이름은 생각이 안나지만 유명한 사람이고 가족들과 밥을 먹으러 온것같았다. 실제상황에 나오는 여자 배우도 밥을 먹으러 온적이 있었고,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삼성의 재판당시 증인을 했던 사람이었었다. 

    종로경찰서 가기 전날 그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기분도 들었었다. 목소리가 그 사람이었다. 박영진 국회의원도 낮에 밥을 먹으러 온것을 본적이 있었다. 

     

    11. 일본에서 돌아오는날 공항철도 이야기는 별도로 적어두었다. (스토커 행위를 하던 중국인 여자두명이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상태에서 쫙 째려보는 것을 하다가 내가 가방에서 초소형카메라안경을 쓰자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버렸고, 

    내릴때 어디선가에서 중국인 남자1명이 같이 합류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갔다 )

     

     

    12. 현재살고 있는 맞은편집 중국할머니 ( 이부분은 나중에 상세히 적겠다)

     

    13. 물류센터에서 스티로폼박스를 잔뜩 쌓아놓은 상태에서 뒤에서 내가 잠시 착각하여 다른 포장지를 꺼내고서 잘못꺼냈다고 생각하여 포장지를 바꾸려는데 갑자기 이쪽으로 오더니 그걸 거기다 쌓으면 어떡하냐고 했었다.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어디에 포장하려고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것이다. 

    아마 그 사람 혼자만 그랬던것이 아니었고, 상당히 많은 인원이 전부다 실수만 하지 않았던것이지 상황은 똑같았다. 

    한 사람의 머리를 여러사람과 연결하여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뭘하는지, 무슨생각을 하는지를 공유한것이다. 

    이것은 피해자가 가는 그 어느곳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날 쉬는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봤는데 

    민망해서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는데 양심은 전혀없고, 마치 들켰다 어떡해 실수했다 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https://youtu.be/FuO2VCndOP4?list=PLtc3DW7XrfNCvmaAepgiAJF9xTjn2e-7A 

     

    그리고 경찰도, 국정원도, 국가인권위원회도, 여성가족부도 도움을 줄 방법이 없다며 뻐대고 있는것이다. 

    이 블로그에 있는 모든 내용만을 다 읽어봐도 충분히 납득이 되고 또 법률적으로 상의가 가능한 부분도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소극적이다. 다 경찰청으로 미뤄버리고 경찰도 소극적인것이다. 

    아이 성기를 움직인것을 영상으로 남겨둔것과 내 신체의 신경을 움직이며 진동을 주는것을 영상으로 찍어놓았는데도 

    단한번도 그것을 제시하거나 보여줘본적이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정황증거만 있는 상황인것인가. 다른 나라라면 증거영상과 그간의 진술을 바탕으로 주변탐문조사부터 실시했을것이다. 이것이 만약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피해자가 늘 이상태로 괴로움의 상태에 머물러서 이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대한민국은 원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힘을 모아, 방송언론이 가세하여, 피해자의 뇌와 신체를 도륙내었고, 

    웬일인지 그 일을 하는데에 중국인들이 상당히 자주 보이고, 저 스티로폼 박스뒤 중국인 아줌마는 마치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듯 행동했다. 

     

    이 나라에서 대체 피해자를 데리고 무엇을 했길래 , 피해자는 날마다 고통을 겪으면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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