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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지독한 하루하루

악인의 한계

by 진실저널 2023. 3. 28.

어제 아이와 얘길하다 아이의 몸을 베베꼬이게 만들어버린 문제와 관련하여 써보고싶었다. 

나는 사람들이 종교를 믿거나, 미신을 믿거나, 과학을 신봉하거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거쳐야만 하는 사유의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반드시 순서대로 가야하는것은 아니지만, 

진리에 다다르는 길에 이런 순서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우선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든 제대로 생각하려면 심성을 갖춰야한다. 

누국나 선과 악, 도덕의 필요성과 그런것들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처리와 배치능력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하도하고 양면성을 갖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모든것에는 심성이 따라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심성은 처음부터 타고나는것인지, 나면서 환경적으로 입혀질수 있는것인지에 대해서

아마도 그 누구도 확신할수는 없을것이다. 

어떤 아이는 굉장히 성격적으로 모난 부모밑에서 상처받으면서 자라나도 심성이 여리고 착하고, 

어떤 아이는 훌륭한 부모밑에서 자라도 패악한 짓만 저지르는 아이도 있다. 

나는 심성이라는것이 타고남과 아이의 선택과 환경적인것을 동반한다고 믿는다. 

심성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으나, 심성이 착하지 않은 아이라서 필요없는것은 아니기때문에

그런 아이는 다른분야에서 타고난 기질을 발휘할것이기때문에 사실 어떤것이 더 낫다고는 볼수없다고 본다. 

그러나 생각을 하는데에 있어서 심성은 반드시 따라야한다고 생각한다.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어린시절 스스로 기준을 성립하기때문이다. 

어떤 문제에 관해 아이는 관점을 갖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 자신과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람의 관계들을 아이들은 은연중에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친절함, 불친절함, 부당함, 배려, 양보 등을 행하는 보고 아이는 판단한다. 

아픈동물을 보고 손가락을 짚어 아프다고 공감하는 표현을 한다. 그리고 그 동물을 아프게한 사람에대해 

부당함을 느끼기도 한다. 

심성은 부당함이나 불합리함에 대해 기준을 잡는데 가장 중요한 척도일수 있다고 본다. 

 

심성을 갖고 관점에 대한 기준이 생겨나면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사춘기시절이되면 그것에 어긋나는

세상에 모순을 느껴나가기 시작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속 주인공은 세상사람들로부터

굉장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심성과 관점의 기준에서 타인들의 행동이나 마음이 도저히 이해되지않고 

때로 용납되지 않기때문이다. 

 

그후로 한차례의 반항적인 시간들이 지나가고나면 자신에대한 모순에 열렬히 반항한다. 자신의 심성과 관점에 대한

기준에 스스로 어긋나기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몸부림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자신에대해, 인간에 대해 알고자 한다. 

어디서부터 오는지모를 끝도없는 막연한 질문들이 생겨나고 그것을 풀기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속의 나라는 틀로 타인을 대해야하고 또 문제없는 사람으로 타인과의관계를 이어가야하므로

이쯤에서 인간은 선택을 한다. 친구와의 대화속에서, 자신을 어느정도나 깊이있게 이해할수 있을는지를 가늠하고

진정한 우정을 찾아보기도 하나 또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관계에서 좌절을 겪기도 한다. 

행복을 주는 친구의 장점들을 살펴보면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정받을만한 어떤 조건들을 잘 갖춘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람과 늘 함께 있으려고 노력한다. 

결국 상대방에 따라 자신을 맞추기도하고 자신에따라 상대방을 맞추기도 해야하는 관계의 법칙을 깨닫고 조율하게되며

더이상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취미가 맞고 대화가 맞으면 늘 같이 있는것이 그저 기쁠뿐이다. 

경쟁하기도 하고 자만하기도 하며 양보와 배려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가슴속에 깊이 존재하는 그런 근본적인 물음과 질문들이 자신들이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럴때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인간들이 그룹지어놓은 그 구성원들 속에서는 그런것들을 좀처럼 느끼지 않는사람들과, 전혀 다른 특질의 사람들이 훨씬 더 유리하게 관계하고, 때로는 그룹자체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거기로부터 이탈하고자 한다. 

늘 끊임없이 이탈을 꿈꾸지만 언제나 관계안에서는 잘지내고, 잘관계하고, 늘 함께한다. 

 

그런 모든 관계들이 정리가 되면 본격적인 몸부림의 시간이 시작되고, 그 몸부림끝에 비로소 어떤 소득을 하나 얻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어떤 하나의 앎이다. 그 앎은 안다라는 말과는 의미적으로 다르다. 조금 나약했던 심성과 그 심성으로부터 갈라져나오는 관점의 기준이 확고해지며 훨씬 강해지고 유연해지는 단계이다. 지식적으로 모든것을 알게되는 앎이 아니라 

법이 없어도 가능한 단계를 말한다. 자신의 기준과 관점으로부터 너무 멀어 막연해보였던 부분들까지 이해하고 깨닫고 지혜가 생긴 상태라는 뜻이다. 그것은 몸부림에서 태어나며 고통이란것이 유일하게 소득을 보는 단계이다. 

이때에만 고통이라는것이 소득을 본다. 고통은 살아가면서 필요한것이고, 고통으로인해 더 나은 도약을 할수 있을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이다. 고통은 무용하며, 아무것도 도약시켜주지 않으며 인간의 시간을 그자체로 정지시켜버린다. 

고통으로 인해 타인을 딱히 더욱 배려하는것도 공감하는것도 아니며, 고통은 오히려 타인에 대한 공감을 반감시킨다. 

그 고통이 클수록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며 아무런 성장의 도움도 감정이나 감성에도 악영향을 끼칠뿐이다. 고통은 사람을

인간되게 하는것이 아니라 딱딱해지고 차가워지며 무디게 만든다. 

삶에서 고통이 필요한 유일한 단계는 스스로 한차례의 알에서 깨어져나올때 필요할뿐이며 그 이후로는 무용하다. 

 

앎은 아는것과 지식이 아니라 어떤 무지로부터 깨어져나오는것이고, 그저 알게되는것이다. 

그 어떤 물음에도 척척 대답할수는 없지만 , 그 어떤 물음에도 사실 망설이지 않는다. 소위 쌓아나가는 만큼 대답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지식과 배움을 먼저 터득하거나 같이 터득한다해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훌륭한 지식을 갖고 있어도 앎하고는 다르게 행동한다. 그것이 지식과는 다른 작용을 하기때문이다.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어떤 현명한 생태에 이르러있는 단계라고 표현해도 좋을듯하다. 

무엇을 먼저 터특하든 지식과 동반하여 앎을 터득한 사람은 창의적일수 있다.

아마도 부처나 예수와같은 존재들이 나무 아래에서 수행을 한다거나 광야로 나가서 얻은것들이 바로 이런것일것이다. 

그 어떤 질문이나 물음에도 답할수 있고, 모든것에 현명해진 상태를 말하는것이다. 

그 앎이 단 한번의 알에서 깨어져나오지는 않을것이다. 앎을 깨우쳐주는것에 고통이나 고문은 전혀 무용하며, 

고통과 고문은 인간을 무디게하고 시간을 정지시키며 거꾸로 가게 만든다. 

오로지 생각하고 터득하는것만이 그 앎을 깨우치는 유일한 방법일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종교를 선택한다해도, 철학을 선택한다해도 무방한 단계에 이르고 지식을 통하여 앎을 발전시켜

나갈 완전한 상태가 된것이다. 

이미 현명한 상태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을 갖는것과 그렇지 않은것과는 다르다. 단순히 학문과 지식을

익혀 이성에 다다랐다고 믿는것은 착각이다. 세상에는 늘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며 보이지 않는 뒷면이 먼저될수도

앞면이 먼저될수도 있는것이다. 

 

종교와 철학과 기타 다른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올것이고, 깊고 풍성해짐으로서 세상에 유익해진다. 그리고 기존의 세상과 질서에 맞지않는것을 깨뜨리고 새로운 개념을 창조시킬수 있다. 

무엇이든 든든해져야 배고프지않고 길을 걸어나갈수 있는것처럼 더 넓은 세상으로의 채비가 완비가 되는 상태인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친 종교와 철학은 설사 서로 상충되는 의견을 가진다 하더라도 지적으로 얼마든지 인정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인간은 심성을 지녀야한다. 

심성은 모든 조건중의 가장 기본이다. 

심성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관점도 없다. 관점이 없으면 모든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부조리나 불합리함에 대해 

복종하거나 쉬이 따르게 된다. 복종하는 사람은 타인을 복종시킨다. 그것이 익숙하기때문이다. 

결국 관점이 없으면 부딪힐곳도 없고 오로지 복종만이 있으며 새롭게 태어날수도 없다. 수행을 한다한들 노동만 될뿐이다. 

그림도 글도 음악도 종교도 철학도 민주주의도 법도 내면도 감성도 모든면에서 부족하다. 

부족함은 부족한 판단을 낳는다. 부족한 판단은 폭력을 낳는다. 결국 폭력과 복종하는것과 복종시키는것에 익숙할뿐이다. 

그러니 모든 사유의 시작은 심성이며, 앎의 첫입구도 심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날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유일한 씨앗이며, 그 씨앗으로부터 열매맺을수 있는 모든 과정들에 매순간 관점이 따르는것이다. 씨앗은 관점을 낳고, 세상을 보게하고, 관점을 가진 생각은 협력하고 타협하고 부딪히게 만든다. 

그러니 창의력과 수행의 깨달음과 모든것의 기본이 되는 틀은 바로 심성이다. 

착한 아이는 손해보지 않는다. 착한 아이는 그 심성을 가진 아이이다. 

 

악인은 절대로 통찰력을 얻을수 없다. 악인은 그저 타인을 복종시킬수 있을뿐이며, 그 복종을 시키게 하기위해 온갖 꾀를 낼 궁리만을 할수 있을뿐이다.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둘의 싸움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