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지독한 하루하루

최고의 사기, 인간은 결국 인간을 뜯어먹고 사는것인가.

가시박힌삶 2023. 3. 26. 09:13

https://youtu.be/Z7wjlHbf8DU

인간이 인간에게 갖고 있는 진정한 본심이다. 인간의 최고의 생산활동은 인간을 속이는 일이다. 

집시라고는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는 늘 호구가 필요하고, 

밥한끼를 먹고 술을 한잔 하고 하는데에도 누군가의 지갑을 여는데에 있어서 전혀 훈훈하지 않다. 

심지어 누군가의 정신과 훌륭한 마음까지도 호구잡히는 세상이 되었다. 

늘 언제나 저런 시선으로 세상을 살고 누군가를 속이고 밀어내는일을 아무렇지도 않게하며 살아남기도 한다. 

저 집시들에게 권력이 힘을 실어준다면 저들은 못할것이 아무것도 없다. 

착취는 단순노동, 돈에도 가능하겠지만 이런 경우에서도 착취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기때문이다. 

영상에서는 작가가 굳이 연극적인 상황을 그린것일지도 모른다고 해설한다. 

서로 속고 속이는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연극일것이라는것이다. 

그말을 들으면서 연극일거라고 생각하는 그자체가 또하나의 사기일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식으로 어떤 문제를 끝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나간다면 상황은 복잡해질것이고, 

결국 진정한 사기꾼이 원하는것을 어느새 얻어가버린 반전으로 마무리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심리학적으로 누군가가 관찰대상자가 되었을경우도 착취의 한 일부로 봐야할것이고, 지들이 왜 관찰해....

그런 관찰을 통해서 이런저런 결론에 이를수도 있겠지만 나의 생각으로 그런것들은 다 우스운것이다. 

관찰즉시 관찰대상은 애초 관찰하려는 목적으로부터 벗어난다. 누구든 조명을 받게되면 변질된다. 

변질된 사람을 관찰하면서 기록하는것은 무의미하다. 

 

유튜브에서 따온 제목이다. 제목이 눈에 띄어서이다. 경계의 사유를 즐겨야 경지에 이를수 있다라는 말에 나는 반대한다. 

고통속에 놓여져야 경지에 이를수 있다? 고통속에 놓여져야 진정한 예술을 볼수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현재

착취하고 있는 대상은 고통속에 놓여져야하고 우리가 볼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어야한다?

뭐 이런 말로 귀결될수있다. 그러나 내 장담하건대 그런 생각은 인간의 시계를 반드시 거꾸로 돌려놓는다. 

 

우리는 슬프게도 운명적으로 저런 집시들의 모양과 속성을 띄고있고, 

우리는 익명을 가졌을때에라야만이 그 추악한 본질로부터 적이 되지 않을수 있다.

그것은 나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깨달음을 얻기위해 자기 꼬리뼈를 맞사지기로 매일 자극하면서 살아가는 인간도 있고, 

심지어 나는 몇차크라 단계까지 한 인간을 가게만들기위해 이런짓을 하고 있는건가? 라는 우스꽝스러운 

의심을 해본적이 있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상당히 긴 시간동안 그런 사이코들의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손가락이 직접 아프지 않았고, 

약탈로 아픈 대상의 지적수준을 낮게 책정했기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고통을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인간은 늘 끝도없이 가만히 있지않고 생산활동을 하며 쉬지 않는다. 

나의 생각으로 경지를 가고싶다면 멈추고 쉬는것이 가장 좋다고 보이나 ,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하다. 

생산하고 또 생산하고 끝도없이 생산하면서 생산하는것에 시달린다. 가만히 있는것을 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가만히 있을때 가장 큰것을 얻을수 있고 가만히 있는것으로 

창의적일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에게는 제발 좀 가만히 있는것만이 세상을 돕는것이라는 생각마저도 들때가

있지만 인간이 늘 생산에 시달리므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으로 취급되므로 늘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배기는것이다. 그러니 그런 생산물들중 대다수의 것들이 또라이같은것들이 많다. 노망이 났다는 얘기이다. 

그 노망이라는것은 젊어서도 난다. 생산에 지쳐 늙어버리는것이다. 그러니 젊고 팔팔하려면 생산이 아니라 멈춤을 

알아야하고 놀줄도 알아야된다. 

 

이미 슬프게도 우리사회는 우리에게 창의력을 원하지 않는다. 

회춘을 노리는 늙은이가 젊은 처녀를 노리듯이 처녀를 가져다 바치는 종들.

딱 그정도의 생산만을 당신들에게 원하는것이다. 

누구도 당신들이 창의적이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속임수이다. 

그러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추하다. 저 그림속의 눈을 당신들은 매일하고 있었고, 

나는 매일 그것을 보면서 구토가 났던 것이다. 나는 유일하게 뇌를 빼앗김으로서 그것을 볼수 있었다.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의 표정을 그린 명화들에서 하나같이 

다른이들이 가볼수 없는 지경까지 가서 참혹하리만치 ' 비애 '적인 표정을 짓는 그림이 존재하는것은 

유일하게 세상이 던지는 돌에 매몰되어 죽음에 이르는 인간만이 볼수 있는 세상이 있기때문이다. 

 

창의적이길 원하지 않는 인간들은 당신들을 길거리에 보냈고, 

개를 끌고다니라고 했고, 온갖 구역질나는 짓을 시켰고, 당신들은 저런 집시들처럼 저런 눈을 하고서

때로는 저런 눈을 서로에게 맞추면서 ' 우린 알고 있지? ' 라는듯이 역겨운 눈맞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생산활동이다. 

 

그러니 그런 현장을 매일 목도한 내게 , 당신들의 선량함과 정의감에 대해 ,

그 필요에따라 집시처럼 움직이는 사고와  사람의 생명보다 정치적인 방향성에 더욱 무게를 두고, 

온갖 거짓을 다해도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비로소 내가 좋아했던 작가 ' 다자이오사무'의 그 공포심을 

이해할수 있을것같았다. 

 

우리는 시시한 존재이기때문에 죽어야하나.

사실 나는 세상이 이쯤까지오면 전쟁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파멸은 새로운 시작을 낳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나는 삶에서 중요한것이 있다고 본다. 

뇌만 빼앗기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존재하는 ' 딴지 ' 는 어쩌면 뭔가를 박차고 나올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어떤 누군가가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시시껄렁하게 시비의 기미를 느꼈든, 왜곡을 느꼈든, 그런것은 일단 차치하고서)

그 의견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할수 있다면 거기에서 얻어지는것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창의력이다. 나는 창의가 생겨나는 모든 과정은 바로 그 경로를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부딪히지않고 아무것도 파생되지 않는다. 별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부딪히며 새롭게 태어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반대하는 사람을 잡아죽이지만 않으면 되고, 참상을 피하면 된다. 

통제하고 막아대고 지탄하고 파괴시키는것은 세상을 거꾸로 돌려 던져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내 안에서 전구가 터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에게 화살을 쏴야하고, 나는 그것에 맞아

속이 따끔거릴만큼 자존심을 회복하고싶어질때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의 뇌세포는 그것을 반박하기위해 모든 세포를 일시에 총출동시켜 내가 생각해온것들과

다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은것들을 배합시켜 최대한 빠른속도로 항거하려 들것이다. 

거기에서 태어나는것이 창의력일것이다. 

 

사람을 속여 뭔가를 취할때 저런 눈을 하지만, 오늘날 

저런 눈은 정신적인 활동과 누군가를 기만할려할때에 생성될것이다. 

그 기만은 어떤식으로든 나와 부딪혔던, 또는 내 의견을 폭력적으로 직시하도록 강제하는, 

우리를 화나게 만든 존재에게 저런 기만술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만이 목적이든, 기만속의 약탈이 목적이든, 약탈 그 자체가 목적이든, 

사람을 속일때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저런 눈을 띄게된다. 

 

이 그림이 연극이 되려면 이 인물들이 실재하지 않는 하나의 설정속 인물들이어야하고, 

이 그림속 인물들중 누구도 약탈되지 않는 상황이어야만 그 설정이 성립된다. 

이를테면 4사람은 연극이었으나, 누군가가 심각하게 그 과정에서 약탈 되었다면 그것은

연극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기이다. 

약탈당한 사람은 자신이 약탈당한 상황이 연극적이든 그렇지않든 어쨋거나 약탈이 이루어졌기때문이다. 

 

사기와 관련된 그림과 해설이라 클릭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다. 재미있는 그림이다. 

해설이 너무도 재미있어 그림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눈이 트이는 느낌이다. 

나의 맞춤동영상으로 온것은 이전 그림들을 내가 시리즈로 보았기때문이겠지. 

 

이 컨텐츠를 악의적으로 매도하려는것이 아님을 밝힌다.

이런 그림을 알게해준것, 이런 컨텐츠를 제작해주어 고맙다. 

그리고 이걸 보다가 내가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것에 대해 심상이 떠올랐고, 

그것을 나의 블로그에 적어보고싶었다. 

 

같은 그림이라도, 같은 해설이라도 어떤시대적상황속에서 어떻게 해석되었나 라는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것같다. 해설을 하는 사람의 시각과 의도는 다른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확대 재배포된다. 

그것이 오늘날 미디어가 가진 힘과 파워이고, 문제점인것같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무엇에 공감할지를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결정하고 배포하게 된다는것이다. 

어떤 현상에 관하여 의도를 가지고 방향을 결정하고 컨텐츠를 제작하게되고 그것이 배포된다라는것은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를 결정해주는것이나 다름없다. 

틀린의견이라도 조횟수가 많이 찍혀있으면 아무런 생각없이 그것이 맞다고 결정지어지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카라바조의 그림이다. 이 영상을 보기전에 맞춤동영상으로 카라바조의 그림이 몇번 날라온적이 있었다. 

순서대로 배합되는 것이니 다음 클릭대상은 카라바조였는데 , 나는 이미 수차례 이에관해 엄청난 찬사도 비난도 

본적이 있어서 어쩐지 껄끄러워 보고싶지 않았다. 웬지 실종사건이나 실종아동사건들이 맞춤동영상으로 날라오던

때가 생각나서이다. 그 카라바조가 영상의 중간에 삽입되어있어 다시한번 의도치않게 보게된다.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질때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것이다. 

서로 속고 속이는것이라고. 

우리만 속인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인 누군가도 사실은 속이고 있는것이라고, 

세상과 사람들의 생각은 상당히 간단한 경로로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사는편이 더 나아보인다. 

공부도 안하고 곧잘 잘못을 저지르던 아이는 자신이 잘못을 잘도 저지르는 축에 속한다는것을 알고

사과도 빠르고 인정도 빠르다. 문제는 지능적인 우등생은 도무지 살면서 잘못이라고는 잘 

저질러보지도 않았고, 잘못을 잘 하지도 않는편이다. 그러니 이런 우등생들한테 사과를 받아내고

잘못했다라는 사실을 인정시키는데에는 , 

수도없이 많은 변명들과, 수도없이 많은 언변과 , 분명 틀린것일진대 맞아보이게 현혹도 잘되고, 

나는 어느새 나의 아이스크림을 전부 다 빼앗겨버리고 울게된다. 

 

셋째 막내의 아이스크림을 한입씩 베어먹은 첫째와 둘째, 둘째는 늘 하던 잘못이라 부모가 나무라면

곧바로 네 라고 말한다. 그리고나서 또 저지르겠지만, 

첫째는 항상 이유가 있다. 이래서 이런것이고 저래서 저런것이고,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내가 도와준것이고, 뚝뚝 흘르면 엄마가 힘들잖아등등 이유가 많다. 

 

내가 한때 컨텐츠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 여론조 ' 라고 의심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점들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갖었던 방향성은 아이스크림을 빼앗기고 있는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누군가가 먹었다면 그걸 왜 먹었는지에 대한 모든 변명에 정확히 방향성이 맞춰져서

수도없이 많은 컨텐츠들이 제작되고 있었고, 

나중에는 왜 아이스크림을 빼앗겼느냐는것이다. 니가 너무 나쁜인간이니 아이스크림을 빼앗겼을것이고

약탈을 당했을것 아니냐. 너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것이다. 에서부터 시작해서 

진실을 회피하여 현상을 왜곡시키는일에 그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참여하여 하나의 군단을 이루는 현상. 

 

그림을 해석하는것은 그려질 당시 작가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보고있는

관람객의 해석이 필요한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다를것이니 

무엇이 어떻게 해석될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하나의 기록으로 남겨두는것이 바람직해보인다. 

 

 

기록은 단 하루의 기록 한조각만 살짝 들여다보게되면 도무지 내용을 알수없을것이다. 

세상에는 기록을 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다. 최악의 거짓말쟁이들을 만나게 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이란 그 흐름을 찬찬히 면밀히 살펴보는편이 진실에 가깝게 된다고 본다. 

기록의 흐름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고, 과연 모든것은 합당했는가. 

이제 미디어나 언론만으로, 특히 방송만으로 세상을 제대로 본다는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도 많은 나쁜짓이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사기는

지식을 현상을 왜곡시키는데 이용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얻고자 그러고 있는 범인들도 참 문제지만 , 더 황당한것은 

현상을 왜곡시키면서 마치 신념처럼 그 사실을 믿어버린다는거다. 그리고 그안에서 정의감을

갖기도하고 분노를 하기도한다. 

세상에 크고 작은 일이 있겠는가만은 남의 똥빠지는일에 자신들의 방향성을 맞춰서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을 무시한채 하늘만 쳐다보고가게되면, 약탈은 어느새 일상화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하나의 윤리적인 체계에 균열이 가고 금이가는 모든 과정에 

내가 서있는지 점검해봐야할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괴물인가. 인간인가. 아무런 책임없이 돌아가는 양상에 하나의 부속품으로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런지. 

 

 

나는 쌈닭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별로 싸우지도 않았고 싸우는걸 싫어하는데도....

그런 쌈닭이 

화살을 쏜다. 

그 화살은 신이 놓는 돌이다. 

회피의 소설은 진정한 정의를 취하는 가장 방해적인 요소일것이다. 

작가들로인해 조작되는 세상은 너무나도 슬플것이다. 

거기에 가장 현명한 답을 할수 있을때 신은 노여움을 풀것이다.